김상철 | 동덕여자대학교 교수
한국화의 침체, 혹은 부진에 대한 지적과 우려, 비단 어제오늘의 일이 아닐 것이다. 이는 이미 만성화된 고질적인 것이라는 데 그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사실 그간 한국화의 문제에 대한 수많은 논의가 있어 왔지만 이러한 상황이 여전히 개선의 기미가 보이지 않음은 그간의 처방이 별반 효험 없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의 한국화는 '전통'의 적자로서 응당 가져야 할 권위의 존엄을 상실한 지 오래이며, '현대'라는 시의성 역시 확보하지 못한 나락의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이성적인 상황 인식과 효과적인 처방이 결여된 채 만성적인 부진의 질곡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던 한국화의 상황은 급기야 그 정체성은 물론 존재 가치조차 회의되기에 이른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광주은행이 한국화의 미래지향적 비전과 새로운 방향의 모색이라는 모토로 의욕적으로 출발한 <제1회 광주화루>가 마침내 개막했다. 이미 학술 토론회 및 치밀한 사전 조사와 준비 과정을 거쳐 적잖은 공을 들여 마련한 이번 기획전은 한국화가 처한 현실을 감안한다면 반갑지 않을 수 없다. 그간 한국화를 대상으로 하는 전국 단위의 공모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1회 광주화루>가 새삼 반갑고 주목되는 것은 단순히 '예향'을 자부하는 광주에서 시작되고 국내 최고 규모의 상금을 시상한다는 등의 외형적인 내용에 그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기존의 공모전에서 드러났던 폐단을 불식하고, 한국화에 대한 미래 비전의 모색이라는 점에서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화루'와 한국화의 정명正名에 대하여
'화루畵壘'는 유래가 있는 명칭이다. 조선 후기 문인화가인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가 제주도 유배에서 돌아와 용산에 머물 때 서화를 하는 제자들이 모여 솜씨를 겨루고 품평을 받았다고 한다. 당시 그림 그리는 이들의 무리를 '회루繪壘'라 하고, 글 쓰는 이들의 무리를 '묵진墨陣'이라 한 것에서 차용한 것이다. '화루'는 회루의 회繪를 화畵로 바꾸어 만든 명칭이며, 당시 회루에 참여했던 화가 중 한 분이 바로 오늘의 남도 문인화의 큰 틀을 마련한 소치 허련小癡 許鍊이라 한다.
이러한 역사적 전거를 차용함은 단순히 고전에서 찾아낸 작은 재치의 드러냄이 아니라 오늘날 '한국화'라는 명칭이 지니고 있는 모호함에 대한 사유의 개진이라 읽힌다. 즉 동양화, 한국화, 현대 한국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명칭이 혼용되고 있는 오늘의 현실은 바로 한국화의 정체성의 혼란을 말해주고 있는 것에 다름 아닌 것이다. 이러한 명칭들은 모두 그것이 속한 특정한 시대의 특정한 상황이라는 역사적 배경을 통해 배태되었던 개념들이다. 이후 한국화라는 명칭으로의 통일은 그것이 지니고 있는 특질과 내용에 대한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논의의 과정 없이 돌연 제시되고 사용됨으로써 오늘의 혼돈을 자초한 것이다. 이번 '광주화루'에서 한국화 혹은 동양화라는 명칭 대신 '화루'라는 다소 낯설고 생경한 이름을 사용한 것은 이러한 혼란의 상황에서 다양한 경향의 작품들을 두루 모아[壘] 그것이 지니고 있는 특질과 내용을 점진적으로 궁구해보고자 하는 의지의 발현이라 할 것이다.
한국화의 침체와 부진은 단순한 명칭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한국화라는 명칭에 부합하는 가치와 내용을 담고 있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화의 위기는 그저 명칭의 부조화가 문제가 아니라 시대정신의 상실에서 비롯된 것이라 함이 옳을 것이다. 전통이란 그것이 속한 시대적 가치와 소명을 반영하며 끊임없이 변화하고 발전해 온 것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즉 전통이란 특정한 양식이나 전형이 아닌 유기적인 정신적 가치로 존재하는 것이며, 그 본질은 언제나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가치를 부단히 수용함으로써 스스로 그 유장한 생명력을 유지시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의 한국화는 과연 무엇을 어떻게 담아내며 이 시대를 기록하고 있는지 되물어야 할 것이다. 전통에 대한 경직된 사고와 맹목적인 수구의 자세로는 변혁을 기대할 수 없다. 더불어 변화를 두려워하는 전형의 답습으로는 새로운 시대와 더불어 호흡할 수 없음은 자명한 일이다. 오늘날 한국화에 필요한 것은 명칭에 대한 집착이 아니라 현대라는 시공에 부합하는 새로운 전통에 보다 천착하여야 한다. '화루'는 특정한 이즘이나 경향, 장르를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현상으로 펼쳐진 오늘의 우리 그림을 널리 모아 그 내용을 살피고자 함이다. 이를 통하여 한국화의 오늘을 가늠하고 내일을 도모하여 점차 그 실질을 충실히 하고자 함이라 이해된다. 그간 한국화에 대한 논의가 한국화 자체에 대한 피상적인 이해와 편의주의적 해석으로 일관되어온 부분이 적지 않았다. 이제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현실에 입각한 냉철한 비판과 이성적인 상황 인식을 통한 내실 있는 모색임은 자명한 것이다.
우리에게 어떠한 공모전이 있었나?
'화루'는 전국 단위의 본격적인 한국화 공모전이라는 점에서 충분히 화제가 될 것이다. 물론 현재에도 적잖은 한국화 공모전들이 산재하지만 그 권위와 위상은 쉽게 긍정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구태의연한 공모전의 형식으로 이번 전시를 기획하여야 하는가에 대하여 적잖은 회의와 의문이 있을 수 있다. 그간 여러 공모전들의 작가 등용문으로서의 순기능은 인정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공모전이 쇠락하여 영향력조차 미미한 행사로 전락한 것은 미술계 스스로 자초한 일이라는 뼈아픈 지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공모전의 가장 큰 폐단은 그것이 공모라는 본연의 형식에 걸맞지 않는 불투명성, 불공정성 때문이었다. 한국 화단에 고질적 병폐로 지적되는 학연과 지연, 혹은 특정한 화풍에 의한 권력화 현상 등은 일정 부분 이러한 공모전의 폐단에서 비롯된 것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공모公募는 공개적으로 널리 모집함이라는 사전적 의미에도 불구하고 이해를 같이 하는 집단끼리 모의하여 나눠 먹는 공모共謀의 오명을 지니게 된 것이다. 수상은 영예롭지 못하고 오히려 의심과 오욕의 대상이 되었다. 이는 미술계의 기성세대가 통렬하게 반성하고 각성하여야 할 부분이다.
'화루'의 주최 측이 공모전의 형식을 추진한 것은 두루 널리 여러 경향의 작품들을 모아 한국화의 현실을 살펴봄에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공모전의 문제가 불공정하고 불투명한 것은 제도의 문제이기에 앞서 운영의 문제이다. 학연, 지연 등으로 얽힌 화단의 구조는 이미 그 자체로 공정성을 담보하기에 신뢰를 상실하였다. 이번 '화루'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와 성패 역시 명실상부한 공모전으로서의 신뢰 회복에 있는 것이었다.
이번 기획의 진행에 있어 운영위원 선정과 심사위원 섭외, 그리고 심사 및 결과 발표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은 철저히 개별적인 연락과 통지에 의해 이루어졌다. 심사위원들은 어떠한 사전 접촉이나 상대방에 대한 정보가 없는 상태에서 독립적으로 심사하였으며, 최종 심사 종료 후 비로소 대면할 수 있게 한 주최 측의 진행은 그야말로 작전을 방불케 하는 것이었다. 더불어 작품에 대한 심사 점수 역시 특정한 경향과 주관성에 치우치지 않게끔 점수 차의 배분은 물론 가중치에 대한 합리적 장치를 마련함으로써 공정에 만전을 기하였다. 이는 매우 까다롭고 번거로운 절차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그간 우리가 경험하였던 공모전이 그만큼 공정하지 못하였고, 결과에 대한 신뢰가 땅에 떨어져 있음을 익히 자각하고 있었기에 불가피한 조치로 이해할 수 있었다. 이번 심사의 결과는 이 시대에도 공모전이 필요한가에 대한 가장 효과적인 답이 될 것이다.
다양한 한국화의 스펙트럼, 그 건강한 생명력
심사 결과 입선된 작품들의 면모는 바로 오늘의 한국화가 지니고 있는 다양한 스펙트럼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이었다. 특정한 경향이나 편향된 양식에 주도된 것이 아니라 다양하고 분방한 작품들이 선정되었다. 주목할 것은 수묵을 기반으로 한 작품들이 주류를 이루는 가운데 채색을 혼용한 이른바 혼합 재료의 작품들 역시 선보였다. 특히 캔버스에 유화로 산수를 표현한 작가의 작품 역시 입선에 듦으로써 심사의 기준이 고루한 전통의 굴레에 머물러 있거나 진부한 양식주의를 추종하고 있지 않음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수묵 역시 전통적인 산수나 문인화적 일필의 심미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를 조형의 수단으로 차용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었다. 한국화에 대하여 언제나 적용되기 마련인 이른바 '전통'과 '현대'라는 상이한 가치에 관한 작가들의 수용 태도는 전통에 대한 적극적인 해석을 통한 현대성으로의 접근과 모색으로 귀결됨으로 확인되었다. 이는 오늘의 한국화가 그저 전통에 머무르지 않고 여전히 변화하고 발전하고 있는 건강한 자생력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었다.
사실 한국화의 외연은 이미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확장되었다. 현대미술의 흐름에 맞추어 다양화, 다변화된 한국화를 하나의 전형으로 규정하는 것은 불가한 일이다. 비록 침체와 부진의 상황 속에서도 심사 결과를 통해 확인된 것처럼 한국화는 어렵게 그 질기고 모진 생명력을 유지해 왔다. 비록 전통과 현대라는 해묵은 과제를 여전히 보듬어 안고 있지만,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패기 방장한 청년 작가들의 등장과 확인은 성과가 아닐 수 없다. 이들은 이미 숙성된 과실이 아니라 이제 싹을 틔우기 시작한 새로운 희망의 단서일 것이다. '화루'가 미래 비전을 가늠해 보고자 함은 바로 오늘의 성과가 아닌 내일의 가능성에 염두를 두고 있는 이유이다. 이는 해를 더해가며 작가를 양성하고 성과를 축적함으로써 건강한 한국화의 실질과 가치를 확인해 줄 것이다.
한국화는 변해야 살고, 또 변하지 않아야 생존할 수 있다는 이중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전통 시대의 경직되고 교조적인 형식 답습의 폐단에서 탈피하여 오늘의 시대와 사회를 호흡할 수 있는 적극적인 모색과 변신을 추구함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화는 변해야 한다. 그러나 한국화가 지니고 있는 유장한 역사적 발전 과정을 통하여 축적한 풍부한 조형 경험과 고유의 심미 체계 등을 지니고 있음을 인정하여야 할 것이다. 이는 우리 민족 고유의 감성과 정서, 이상 등을 내재하고 있는 특수한 형식임을 상기한다면 이러한 근간이 되는 요소들은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비록 과도기적 상황에서의 불가피한 현상이라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지나치게 과격하거나 급진적인 모색과 추구는 부작용만을 낳을 뿐이다.
오늘의 한국화 상황을 개관하여 볼 때 이러한 기대와 염려가 교차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간 한국화에 관한 수많은 담론들이 질책과 경고로 일관되었던 점을 상기한다면, 이제는 정확하고 이성적인 진단에 의한 올바른 처방과, 이를 통해 다시 거듭날 수 있다는 확신과 신념을 확인하고 애정과 신뢰를 바탕으로 그 향방을 지켜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오늘의 한국화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해를 전제로 한 애정과 믿음이며 기다림이라 할 것이다.
그 시작이 바로 <제1회 광주화루>이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