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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인의 작가전

4회 수상작가

  • 대상. 이동환
  • 최우수상. 정지현
  • 우수상. 권세진, 김명진, 차현욱

10인의 작가

권세진, 김명진, 문현지, 윤준영, 이동환, 이여운, 정지현, 진민욱, 차현욱, 허용성

제4회 공모전 심사총평

  • 심사위원 서은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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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화여자대학교 교수

    전대미문의 바이러스가 익숙했던 삶의 질서와 양상을 흔들어대기 시작하자 지금까지 견고해 보이기만 했던 세상은 약한 고리들을 여과 없이 드러내며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러나 이 어지러운 상황 안에서도 점진적으로 새로운 질서를 구축해 나가려는 시도와 움직임 또한 관찰되고 있다. 습관화되어 있는 생활방식이 흔들리고 요동치는 것은 불편하고 불안하기는 하지만 이러한 격변의 시기에만 작동 가능한 보편적 인식과 고착된 믿음에 대한 전면적 재사고, 재평가의 과정을 통해 기존 질서가 무너지면서 생겨나고 있는 변화의 조짐을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지켜보고 있는 중이다.

    돌이켜 보면 우리는 늘 무언가를 쫓아가는 삶을 살아왔다. 선진국/개발도상국/후진국이라는 카테고리 하에서 정치, 경제, 교육, 문화, 예술 등 영역 구분할 것 없이 선진국이라 분류되는 구미권 국가 유형을 롤모델 삼아 정신없이 달려왔다. 그러나 예상치 못했던 신종 바이러스의 범유행 사태가 터진 후 지금껏 세계 선도국이라 믿어왔던 국가들에서 일어나는 비이성적 조치와 행태들을 목도하게 되면서 긴 기간 동안 선망의 대상이었던 선진국 신화가 더 이상 존속되기 어려울 수도 있음을 직감하게 된다. 갑작스레 던져진 이 일시 멈춤의 시간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논의하며 어떤 미래를 준비해야 하는가? 이번 기회를 빌어 외부에서 유입된 타자의 기준이 아닌 스스로 설정한 기준을 따라 자체적 발전을 도모해 나갈 수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구축하는 경험을 해볼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대한다.

    이런 자세는 한국화단에도 절실하다. 돌이켜보건대 근현대 한국화의 주요한 변화를 이끌어낸 이슈들은 대부분 외국으로부터 이식되거나 또는 그로부터 파생된 것들임을 부정할 수가 없다. 고립된 폐쇄적 사회가 아닌 이상 외부와 상호 간 영향을 주고받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겠으나, 우리나라의 경우는 특정 문화권과의 교류에서 주고받음이라는 수평적 방식이 아닌 일방적 수용 또는 추종에 가까운 수직적 방식의 관계 맺음을 해온 것이 사실이기에 구미권 국가의 미술 경향성과 그 흐름에 대한 자발적 편입, 의존적 편향성이 현재 한국화단이 안고 있는 여러 문제들을 잉태시켰다고도 볼 수 있다. 이른바 세계화의 기준과 흐름에 합류하기 위해 끊임없는 자기부정의 과정이 진행되어야 했고 부정에 부정이 반복된 결과, 이제는 한국화의 존재 근거가 되는 전통이 무엇인지조차 희미해져가는 상황까지 직면하게 된 것이다.

    현대미술에서 자본과 미술의 관계는 더욱 끈끈해져가고 있으며 한 발 더 나아가 예술 창작과 향유의 활동이 엔터테인먼트 성격을 띤 국제적 비즈니스 관점으로까지 다루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경제적 강국의 미감과 시선으로 세계 미술이 주도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일 수도 있겠지만, 달리 보면 이것은 그들이 구축한 미적 질서를 중심축으로 하고 있는 또 다른 의미에서의 사고와 감각의 획일화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음을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모두가 목소리 높여 한국화의 위기를 말해온 지도 꽤 오래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위기 상황이라 진단 내려진 지는 오래이건만 그 위기를 촉발한 원인에 대한 다각적 분석이나 그에 따른 구체적 해결 방안은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이다. 모든 논의는 피상적 원론 안에서 끝없이 맴돌고 있을 뿐 현재의 상황을 적극적으로 타계하기 위한 실질적 움직임은 잘 포착되지 않는다. 마치 지금의 분위기를 시대적 흐름이라 인정하면서 그 도도한 물결에 함께 휩쓸려 내려가기를 작정한 듯 보이기도 한다.
    현대의 한국화가 전통성과 동시대성 모두를 담보해야 한다는 관점에는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이다.

    그러면 지금 한국화가 위기인 것은 전통성을 담보하지 못해서인가 아니면 동시대성을 담보하지 못해서인가? 우리나라에서 작가들을 배출하는 보편적 통로가 대학의 미술교육임을 전제하고 살펴보자면 각 대학의 한국화 전공교육에서 지속적으로 강화시켜온 것은 세계화의 기치 아래 동시대성을 획득하기 위한 성격의 수업들이었다. 상대적으로 전통적 창작방식이나 동양적 심미체계를 집중 교육하는 과목들은 줄어들고 그 빈자리는 전공의 경계를 허무는 문화적 혼성의 경향을 띤 수업들로 채워져 갔다. 이와 같이 동시대성에 상대적으로 많은 무게중심을 둔 일련의 교육 과정을 거쳐서 배출된 작가들이 현재 활동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한국화의 위기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상황은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는가?

    사실 동시대성이라고 하는 것이 교육과정을 통해서 전달되고 또 훈련될 수 있는 영역인지는 의문스럽다. 모든 이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특정한 시대를 살아갈 수밖에 없기에 그 시대의 지배적 관념이나 의식 또는 정서, 문화 등에 영향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므로 동시대성의 문제는 어찌 보면 각자에게 나름의 방식으로 스며들어 있다가 개별 작품 안에서 자연스럽게 발현될 수 있는 부분인 것이다.

    그에 비해 역사적 흐름 위에서 오랜 기간에 걸쳐 점진적으로 구축되어 온 전통의 영역은 특화된 전문적 교육과정 안에서 직접적으로 경험하며 체화시켜나가는 시간의 집적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습득되기 어렵다. 고교 입시미술에서도 모필을 다루기는 하지만 오직 대학 입시에 최적화되어 시험에 출제되는 유형의 그림만을 집중적으로 훈련하는 방식으로 수업이 진행되고 있기에, 우리나라 미술교육 체계 안에서 한국화의 전통과 관련해 심도 있는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기간은 대학 시기가 전부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러나 대학교육에서조차 전통을 집중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기간은 공개된 다수의 커리큘럼에 따르면 대부분 1, 2년 정도에 지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이 얕은 경험을 토대로 그들에게 전통을 이어나감과 동시에 그것의 현대화까지 이루어내라 요구한다면 이것은 특정 언어의 기초 과정을 겨우 거친 사람들에게 고도로 심화된 연구 논문을 쓰라고 요구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결국 한국화 작가를 교육, 배출시키는 의무를 가진 대학의 미술 교육이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해 온 부분도 현재의 위기 상황을 만든 근원적 이유 중의 하나일 수 있는 것이다.

    정리해야 할 시기를 놓친 모든 문제들은 때가 되면 어떤 식으로든 또 다른 분란의 국면들을 야기하기 마련이다. 돌이켜 보면 우리는 아직 동양화와 한국화라는 호칭 사이의 해묵은 논쟁조차 정리해 내지 못했다. 1950년대 청강 김영기 선생이 한국화라는 명칭의 사용을 주창한 이래로 70, 80년대를 거치면서 많은 논의들이 있었으나 이렇다 할 만한 결론을 도출하지 못했고 이제는 그 논의를 다시 꺼내는 것조차 민망해질 정도로 무색한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그 결과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동양화와 한국화라는 명칭이 혼용되고 있으며 이는 결과적으로 불분명하고 모호한 정체성을 스스로 인정하는 모양새가 되어버린 셈인 것이다.

    최근 대학에서는 서양화와 한국화를 모두 합쳐 평면회화라 지칭하는 묶음을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하고 있으며 그 움직임 앞에서 조금씩 자신의 자리를 내어주고 있는 현재의 상황은 결국 우리가 만들어 낸 결과라 할 수 있다. 모두 한국화가 위기라고 진단만 할 뿐 그 문제를 풀어나가기 위해 어떤 방식으로든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면 종래에 전통회화의 명맥이 끊어지는 상황도 충분히 도래할 수 있다. 만약 그런 결과가 온다면 적어도 지금 현재 한국화단에 발을 딛고 서 있는 자는 누구든지 그 책임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지난한 한국화의 상황을 온몸으로 관통하며 각자의 방식으로 치열하게 작업해 나가고 있는 젊은 작가들의 다양한 면면을 이번 공모전 심사 과정에서 접할 수 있었다. 4회로 접어들고 있는 본 공모전에 참여한 작가들 중 이미 일정 지명도를 획득한 작가군과 이제 본격적인 작업세계를 열어가기 시작하는 신진작가군의 비율이 적절히 섞여있다는 점에서 광주화루 공모전이 안정 궤도로 올라서고 있다
    평가할 만하며 앞으로의 지속적인 성장 가능성까지도 예측해볼 수 있었다. 최대한의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3차에 걸친 모든 심사 과정을 각 심사위원이 독립적으로 진행하는 방식은 올해에도 적용되었으며, 심사는 '예술성', '독창성', '발전 가능성'의 항목에 비중을 두고 이루어졌다.

    이동환은 필연적으로 모순을 내포하고 있는 사회와 개인 사이에서 벌어질 수 있는 다양한 충돌의 지점과 그에 대한 비판적 분석의 시선을 때로는 직설적, 때로는 은유적 방식으로 시각화해 나가고 있다. 현대 사회가 촉발하는 다양한 감정이나 정서 등에 주목하며 작업하는 다수 작가들의 그림에서 허무와 무기력 등 사회구조 안에 이미 순응해버린 비주체적 태도가 감지되는 것과는 달리 이동환의 작업에서는 80년대 한국미술을 주도했었던 이른바 민중미술의 주요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주체적 저항의지가 여전히 포착된다. 자신을 둘러싼 현실에서 출발한 그의 그림은 외면이나 회피, 또는 현재의 상황에 대한 자기애적 감정 토로 중심의 소극적 방식이 아니라 다시 그 현실에 대해 통렬한 질문을 던지게 만드는 적극적 방식으로 현실을 직시하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 긴 기간 동안 변함없이 일관된 주제로 작업을 해나가면서도 조형적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고 지속적으로 생동감 있는 화면을 구축해 나갈 수 있다는 것은 그 주제를 대하는 작가의 태도가 습관적이지 않다는 사실의 방증일 것이다. 그의 진중함과 일관된 우직함이 작품 안에 단단하게 녹아들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목탄과 흰색 물감만을 이용해 그려낸 정지현의 그림들은 이번 공모전에서 눈길을 끈 여러 작품들 중 하나였다. 그의 시선은 항상 소시민들을 향해 있고 그들 삶의 지극히 일상적인 한순간을 포착해 담아내고 있는데 스스로는 일종의 거리두기를 통한 관찰자적 시선을 취하고 있다 설명하고 있지만 묵직하게 다가오는 그림들 저변에는 그려지는 대상들에 대한 숨길 수 없는 애잔한 연민의 감정이 깔려 있다. 다듬어지고 포장된 전면부의 삶이 아니라 본 모습이 가감 없이 노출되는 후면부 삶의 팍팍한 실상을 덤덤히 형상화함으로써 사회구조 안에서 한 인간이 감내해야 할 크고 작은 인생의 무게를 읽어내게 해준다. 무엇보다도 이번에 제출된 그의 포트폴리오에서 확인된 많은 작업량은 앞으로의 성장에 대한 기대를 가지게 만드는 요소였다.

    좁아진 작업실 여건에서 지속적으로 그림을 그려 나갈 수 있는 방식을 고민하다 등장했다고 하는 권세진의 조각 그림은 평이해 보일 수 있는 밤 풍광을 잘게 조각나 있으면서도 서로 연결되는 분절의 방식으로 담아냄으로써 작품 안에서 독특한 시각적 긴장의 질서를 만들어 내고 있다. 먹을 이용해 어둠이 내려앉은 고즈넉한 밤의 분위기를 감각적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근거리에서 살펴보면 바탕재로 사용된 순지라는 얇은 종이가 머금을 수 있는 만큼의 먹만 품어내며 만들어진 검은색은 그리 깊은 어두움에는 도달하지 못한다. 바스락거리면서 때론 번들거리는 광택감까지 느껴지는 그의 먹빛 야경은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보는 이로 하여금 불안함과 위태로움의 감정을 함께 경험하도록 유도한다. 특정한 풍경과의 조합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매혹적인 결과를 만들어 내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분절된 조각 이미지가 별다른 시각적 효과를 불러오지 못하는 경우도 보여지기에 자신이 사용하는 조형 방식이 어떤 경우에 가장 감각적인 순간을 연출할 수 있는지에 대한 분석과 고민이 이어진다면 그의 작업은 더 큰 성장을 이루어낼 수 있을 것이다.

    김명진의 작업을 관통하는 주조적 감성은 음울함이다. 다양한 대상으로부터 탁본의 방식으로 얻어낸
    먹 얼룩의 조각들을 콜라주 방식으로 붙여 나가며 구체화시킨 형상들은 붓으로 그려낸 그림으로는 표현해낼 수 없는 괴이한 울림을 만들어낸다. 완전한 해독은 불가능해 보이는 암호와 같은 그의 그림은 무의식의 심연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듯하다. 문제는 그가 무의식 안으로 깊게 침잠할수록 작업이 알아듣기 힘든 독백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는 점이다. 아픔과 상처 그리고 고통과 고독을 녹여내고 있음은 충분히 감지할 수 있으나 화면 위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중세 유럽풍의 인물들 앞에서 무엇을 고리 삼아 감정이입을 해야 할지 때론 난감해지기도 한다. 작가가 알테르 에고라 지칭하는 소년과 소녀들이 자아의 어떤 부분을 비유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인지, 혹여 실체가 불분명한 모호한 감정들은 아닌지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으며, 이들이 중세의 잔혹동화 안에 박제처럼 머물러 있지 않고 현재의 시공간 안으로 넘나들 수 있도록 만들어 줄 수만 있다면 그의 작업이 뿜어내고 있는 에너지는 더 강하게 증폭될 수 있을 것이다.

    차현욱이 제출한 포트폴리오를 보면 2013년부터 2016년까지는 부분적으로 클로즈업된 자연 풍경과 다양한 먹 표현을 연결시키는 작업이 집중적으로 진행되었고 2018년의 작업부터 개인적 경험과 감수성 그리고 상상력을 기반으로 한 서사적 구조의 화면이 등장하기 시작하는 것으로 보인다. 본 공모전 심사에서 비중을 두고 평가한 부분은 2018년 이후의 작업들이다. 현실 속에 실재하는 것 같은
    한 장소와 그 공간을 채우고 있는 우주의 기운을 화면 가득 차고 넘치도록 시각화한 그의 작업들은 기묘한 신선함을 불러일으킨다. 사실적 자연 풍경을 그려낼 때에는 지극히 평이해 보이기만 하던 먹 표현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기운을 담아내기 시작하자 거침없는 분방함을 표출하며 흥미롭게 요동치기 시작한다. 습관화된 발상과 표현의 방식을 한 겹 벗겨내니 조형의 신세계가 열린 셈이다. 신진작가군에 해당하는 차현욱이 긴 기간 동안 '먹'이라고 하는 전통 재료의 미감에 중점을 둔 작업을 지속하고 있는 점도 높이 평가할 만하다. 한국화를 전공하고 있거나 또는 전공한 많은 이들이 비한국화 재료의 사용을 통해 새로운 표현 감각을 손쉽게 얻어내고자 움직이는 반면, 차현욱은 종이, 먹 그리고 전통적인 창작 방식만으로도 자신의 감수성을 개성 넘치게 드러내 보일 수 있음을 그림으로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서서히 구축되어가고 있는 그의 작업세계가 앞으로 어떤 행보를 보일지 현재로서는 정확히 가늠할 수는 없으나 그가 자신의 작업 양식과 태도가 가지고 있는 유의미함을 진지하게 이해하길 바란다.

    이번 공모전에서 아쉽게도 수상자가 되지는 못했지만 빼어난 기량의 전통적 비단 그림을 선보이고 있는 진민욱, 문현지, 부드러운 선염으로 도시의 건축물을 몽환적으로 그려내는 이여운, 극사실의 기법으로 무표정한 인물들을 특유의 뿌연 화면으로 담아내는 허용성, 개인의 고립감과 불안함을 절제된 방식으로 담담히 그려내는 윤준영의 작업 모두 주목할 만한 작품들이었다.

    광주화루 공모전에 관심을 가지고 참여해 준 모든 지원자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하며 이번 결과는 제출된 자료를 바탕으로 지금까지 제작된 작업들과 그 과정이 보여주는 성취 정도에 한정해서 진행된 것인 바, 본 결과가 지원자들이 앞으로 보여줄 변화와 성장의 가능성까지 결론지어 판단한 것은 아님을 밝혀둔다. 한국화단의 미래는 젊은 작가들의 움직임과 행보에 달려 있기에 앞으로도 지금과 같은 열정으로 창작에 지속적으로 매진해 줄 것을 당부하면서 본 공모전에 참여한 모든 작가들이 바로 그 미래를 이끌어 갈 주축임을 잊지 말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