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화루 심사평
한국화를 그리고, 보고, 가르치는 일에 제법 많은 시간을 보냈지만, 아직 한국화가 무엇이냐는 질문 앞에서는 머뭇거리게 된다. 한국화를 규정하려는 수많은 시도가 있었지만 그럴수록 한국화는 더욱 멀리 달아나는 것 같다.
미술의 지평 속에, 회화의 지평 속에 한국화가 있는 것인데, 지금까지의 인식은 그 지평을 외면한 채 특수성이나 당위성 같은 미술적이지 않은 기준으로 한국화를 바라본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이러한 당위들을 가장 부자연스럽게 느끼는 이는 다름 아닌 작업의 길에 한국화를 운명처럼 받아들여 버린 작가들이다. 어떠한 매체라도 자신을 자족시키려는 인력이 있을 것이다. 매체라는 몸의 역사성은 작업의 과정뿐만 아니라 결과로서의 작품감상의 순간까지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 한국화의 경우 그러한 인력이 유독 센 것이고, 작업은 늘 위태로운 경계에 설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작가란 그 인력의 끝단에서 너머를 향해 부단히 운신하여 미지의 영역에 가 닿으려는 존재이어야 한다.
이번 광주화루를 심사하면서 매체에 종속된 태도보다는 매체의 끝에 서서 그 너머를 마주하려는 태도와 자신의 삶의 모습과 세상에 대한 생각들을 진솔하게 표현하려는 작가의 태도를 살피려 노력했다. 1차 포트폴리오심사, 2차 실제 작품심사를 거쳤고, 특히 3차 인터뷰 심사를 통해 작가의 목소리를 마주하면서 한국화 작가들의 미술과 자신의 삶을 일치시키려는 노력에 적잖은 감동을 할 수 있었다. 모든 작가가 평가를 받아야 마땅하나 여기서는 입상자 중 인상 깊었던 몇 명의 작가들을 언급하고자 한다.
고현지의 회화는 일상의 이면에 존재하는 비가시적 세계를 감촉하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발묵과 필선의 운용, 그리고 풍경을 구성하는 자연물과 인물의 묘법을 고전 회화의 어법에서 가져왔지만, 작가는 고전을 천착하기보다는 지금 작가가 마주하는 현실의 비의를 담담하게 펼쳐내는 데 집중하고 있다. 안개에 쌓인 공간 속에 있는 인물들은 느슨하게 관계하며 미지의 사건 속에 있다. 모든 것은 알 수 없이 모호한데 그 가운데서 유령같이 떠오르는 것들이 있다. 산수화, 인물화의 전통과 지필묵이라는 매체의 관념적 속성이 현실의 이면에 존재하는 비가시적 리얼리티와 만나는 흔치 않은 경우라 하겠다.
손승범의 회화는 한국화와 서양화의 아슬아슬한 경계선에 서 있다. 재료와 기법은 전통적인 것에서 출발하였으나 그것을 사용하는 방법은 서구적 회화의 어법을 다분히 수용하고 있다. 그가 그리는 대상들, 이를테면 잡풀이나 키치적 석상, 돌 등은 작가가 마주하는 폭력적 사회구조 속에서 희생될 수밖에 없는 존재들을 대변한다. 작가는 이것을 화면 전면에 극사실적 묘사를 통해 견고하게 배치하고, 다른 이미지와 중첩시키는 화면구성을 통해 상징성과 기념비적 속성을 부여한다. 그의 회화에서 소외된 존재들은 마치 서구고전 회화 속의 성상들과 같은 지위를 부여받는다.
김태형의 작업에 대한 첫인상은 회화적이기보다는 일러스트레이션이나 만화적인 것으로 보였고 다분히 상업적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러나 인터뷰 심사에서 작가와 대화하면서 한 가정을 꾸리는 생활인으로서 작업을 삶과 일치시키고 삶의 방편으로 삼으려는 작가의 진솔한 태도를 마주하고 처음의 오해를 거둘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작가가 그려내는 미니어처화된 사물들로 이루어진 풍경은 관념적 사고에 눈 돌릴 틈 없이 삶의 구체성이 뿜어내는 열기로 가득하다. 화면을 구성하는 집요함도 인상 깊었지만, 무엇보다 삶에 대한 긍정에서 나오는 솔직함과 명랑함이 큰 매력으로 다가왔다.
김준기는 출품한 작가 중 다루는 매체가 한국화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작가가 아닌가 싶다. 거울을 긁어낸 흔적을 led전구로 투사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지는 그의 회화는 지필묵을 사용하고 있지는 않으나, 동양화의 필법을 출발점으로 하고 동양미학을 근간으로 삼고 있어서인지 서구회화의 풍경화와는 다른 명상적 느낌을 자아내고 있다. 아버지의 부재라는 개인적 서사에서 출발했던 작업은 최근의 작업에 이르러 사회적 소외의 문제에 시선을 돌리고 있다. 매체의 확장을 꾸준히 실험하고 있지만, 여전히 동양적인 미의식과 한국화의 장르적 속성에 대한 존중을 견지하고 있는 가운데 개인적 서사를 사회적 서사로 확장해 가고 있는 점을 주목하였다.
김현수는 유년기를 보냈던 제주도의 풍경에서 비롯된 기억의 표상으로서의 풍경화를 그리고 있다. 제주도의 풍경을 원형으로 하였으나 특정한 장소를 그리기보다는 생의 순간들에서 길어 올린 감정과 감각 같은 것으로 풍경을 재구성하고 있다. 작가 노트에서 한국화의 고유한 공간표현과 장지에 쌓이고 스미는 물성에 대해 밝히고 있듯이, 화면은 원근이 소멸되고 평평하게 펼쳐져 있으며 마치 헝겊 조각을 기워내듯 풍경의 조각들을 짜 맞추고 오랜 시간 붓질의 반복으로 선염하여 정서적 감흥으로 가득한 회화성을 획득하고 있다. 김현수의 회화작업에서 주목할만한 것이 또 있다면 한국화 매체의 물질적 특성을 유지하고 있지만, 그것이 전혀 고답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발현된다는 점에 있다. 매체를 존중하지만, 거기에 머무르지 않는 작가의 고유한 채취가 발현되고 있고, 활달하고 단호하지만 숨죽인듯한 고요함이 있어서 더없이 아름답게 다가왔다.
입선작에 선정된 작업 중에선 ‘눈치인간’ 연작을 선보인 정덕현의 작업을 주목하여 보았다. 단조롭고 어눌한 형태로 그려진 그의 초상화는 구체적 인물을 재현한다기보다는 ‘눈치’라는 어찌 보면 사소하지만 인간관계에서 중요한 표정을 반복적으로 보여줌으로써 관계 속에서 살아가야만 하는 우리의 속내를 해학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의 작업은 이번에 출품된 작업들 중 가장 눈치를 보지 않은 작업일지도 모르겠다. 한국화에 덧씌워진 매체에 대한 무게감이 없고, 현대미술에 대한 자의식도 걷어내 버린 상태에서 오로지 자신의 체험과 생각으로만 우직하게 밀고 나가고 있다. 투박하고 어눌한데 오히려 거기서 정직하고 진솔한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서두에서 밝혔듯 나는 한국화가 어떤 특정한 매체라는 시각을 전제하고 작가를, 작업을 보려는 태도보다는 여느 매체를 다루는 작가와 마찬가지로 자신에게 운명적으로 주어진 매체를 보듬고, 때로는 그것에서 멀어지기도 하면서 자신의 삶의 모습을 바라보고, 세상에 대한 생각들을 나름의 방법으로 해명하려는 작가들의 태도를 중심으로 작업들을 보려고 노력했다. 무엇이 한국화인가, 또는 이것은 한국화인가라는 시선 속에서 정작 보아야 할 것, 이를테면 그림에서 우리가 가치를 부여하는 삶의 보편적 가치와 아름다움은 가려지는 것 같다.
이번 광주화루 심사를 통해 한국화 매체를 다루는 많은 작가들이 가진 고민의 모습들을 살펴볼 기회가 되었고 예전보다는 좀 더 분방하고 자유롭게 한국화를 사유하며 자신의 작업의 길을 모색하고 있는 작가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한국화 매체가 과거와 연결되어 있기보다는 현재에, 그리고 작업을 하는 작가라는 주체에 먼저 연결되어 있다는 데에 눈을 돌리고 나면 작업들은 보다 아름답고 풍성한 것들을 내어주는 것 같다. 이번 광주화루에 출품한 모든 작가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고 싶다.
정재호(세종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