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화가
화면을 어떻게 채우는가는 화가에게 가장 큰 일이며 실력을 보여주는 바로미터이다. 알곡을 수확하는 농부의 마음으로 각자의 조형 세계를 펼쳐가는 한국화 작가들의 작품을 심사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작업실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열정을 다해 작업했을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찡하다. 응모한 포트폴리오들 속에서 정성스레 의미를 부여해 제작한 작품들이 무엇보다 눈에 더 들어왔다.
2차 선별된 작품들 앞에서는 녹록하지 않은 화업 畫業을 택한 작가들에게 돈독한 동지애를 느끼기도 했다. 그들에게 마음속 뜨거운 박수를 보낸다. 이 작품들을 평가하는 나만의 기준은 '독창성', '성실성', '대상의 자기화', '조화' 4가지였다. 3차에서는 10인의 신작 20점, 1인당 2점의 작품에 대해 작가들의 이야기를 듣고 준비한 질문을 통해 열정과 진정성의 개인차를 확인하는 시간을 가졌다.
심사를 마치고, 몇몇 작가들의 작품 심사 소감을 담담히 적어 본다. 다음은 내가 눈여겨 본 작가들이다. 이성경, 이곤, 우민정, 성민우, 황규민, 오세경, 송윤주, 박형진, 정해나, 이영빈, 장재록, 이여운, 진민욱, 이은지, 김유경, 채효진, 임철민, 임현경, 주형준, 윤혜선, 정서인, 김현수, 최혜인.
이성경은 침착, 정직, 수고의 짐을 느끼는 작업을 한다. 대상의 거리는 일정하지만 뻣뻣한 사물은 아직 춤을 추지 않는다. (깊고 깊게 스민) 매체의 자국이 만든 움직임 없는 고요가 이제 우리에게 생기 넘치는 이야기를 들려줄 것 같아 앞으로 더욱 궁금해진다. 화면을 가득 채운 단면의 풍경은 작가가 가진 그리기의 힘을 잘 보여준다. 목탄으로 드로잉 하는 소리가 새어 나오는 듯하다. 작품에 소박한 느낌이 드는 이곤의 응시는 대상의 자기화에 들어섰다. 핸드메이드 천연재료와 새로운 매체로 성실한 손맛을 내는 작품을 한다. 지속적인 발전을 기대한다.
우민정은 우리 땅 흙(황토, 백토)을 바탕에 두고 작업을 한다. 유년시절 부지깽이로 회벽에 낙서하던 추억이 떠오른다. 마음 속 생각을 부유하는 이미지로 자기화한 드로잉을 자유롭게 할 줄 아는 작가다. 가로지르는 색면 위를 지나는 덩어리와 반복되는 여러 개의 선은 화면을 눈부시게 꾸미면서 동시에 힘찬 필력으로 속도감을 더해 팽팽한 긴장감을 선사한다.
끊임없이 비단 캔버스와 사투를 벌이는 성민우의 금분 선묘 드로잉은 풀숲, 잡초 사이사이 공간 너머의 활짝 핀 꽃과 같은 우리네 긴 인생 여정을 담는다. 조화와 균형감을 가장 주요한 가치로 생각하는 작가다. 하나의 완성된 작품 이후 생각을 옮기는 과정에서 한지 목판/판화 작품을 진행하는 황규민은 그리기의 작품세계를 넓혀가고 있다. 탁월한 수묵 작업에 격려와 박수를 보낸다. <종단-벼락 맞은 나무> 작품을 준비하면서 가졌던 열과 성의가 있다면 앞으로 더 많은 명작을 기대한다. 훌륭하다.
오세경은 한지에 아크릴로 작가 특유의 집요한 극사실적 묘사와 은유를 통한 사건들을 여과 없이 들추어내며 본인의 메시지를 꾸준히 세상에 보낸다. 특출한 묘사를 바탕에 둔 작품은 매우 현대적인 품위를 지향한다. 송윤주는 성냥개비 쌓기 놀이처럼 즐겁고 명랑한 그림을 그린다. 그렇다고 가벼운 그림은 아니다. 작가가 속한 범위의 공간을 지속해온 어여쁜 기호화, 시적 추상으로 격조 있게 풀어가고 있다. 보다 심리적이고 깊은 울림의 다양한 작품을 다수 기대해 본다.
박형진은 화면 가득 가볍게 떠오르는 숲의 일부, 땅의 일부에서 응축된 생명들의 표정을 선과 점묘의 레이어 된 회화로 잘 소화하고 있다. 숲 속 깊은 곳의 호흡을 중첩된 먹선으로 표현해 평범하지 않은 기운의 흐름을 담은 작품으로 보상받는 것 같다. 일 년의 숲<July to June>작품은 정말 독창적이다.
정해나는 매우 차분한 먹을 사용한다. 바람이 없는 고요한 호숫가에서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하다. 예민한 층위의 감미로운 표현은 오랜 시간 축적된 조형 훈련의 유산인 듯하다. 때론 내 것이 아닌 것도 바라보면서 조형적 혼합을 시도하면 보편적 이야기의 호소로 분명히 확장될 것이다.
이영빈은 자신만의 선의 세계를 갖고 있다. 먼 하늘 위에서 때로는 내려다보는 시선으로 세상과 집, 사람, 나무, 사물을 그리고 있다. 마음속 여백엔 항상 자화상 같은 독특한 그림을 그린다. 이제 자기화 이후 더욱 다양한 선상의 작품을 기대한다. 장재록은 철처럼 견고한 멋진 현대 산수화를 지속적으로 그려온 작가다. 대상 속으로 들어가는 발자국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이제는 확장된 캔버스 작업으로 보다 적극적인 물성이 보이는 작품으로의 전환도 필요해 보인다.
이여운은 선과 선, 선들과 선들이 연결되어지면서 만들어지는 건축물의 순수 에너지를 그린다. 그래서 만들어지는 형상의 심미성은 또 다른 이여운표 양식미를 보여주고 있다. 때로는 더 부드러운 접근을 통해 따스한 서정을 느낄 수 있길 기대한다.
진민욱의 비단 위에 먹과 채색으로 재구성한 마을과 정원 속 동식물들은 생기 가득하다. 작가의 붓을 통해 그려진 꽃들은 양분을 충분히 머금고 잎사귀는 햇살을 받아 행복하다. 화면 전체에 생동하는 색의 기운은 옹달샘처럼 맑은 작가의 마음에서 나오는 듯하다. 답답하고 아픈 인간, 어찌할 수 없는 존재의 모습을 형상화해 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작품을 하는 이은지는 특별한 조형감각을 가졌다.
한 전시공간에서 오브제와 함께 작품이 있을 때 극대화된 힘이 있는 메시지를 얻는다. 화면을 신체 크기 이상으로 확장해서 하는 독립된 대작도 볼 수 있었으면 한다.
김유경은 솜털처럼 부드럽고 아름다운 수묵을 그린다. 그러나 방황하는 생각이 바람과 공기, 꽃향기를 태우는 햇볕까지 화선지 위에 드라마틱한 흔적을 남긴다. 오랫동안 길 위에 혼자 남아 있는 자아를 발견하지만 담담한 묵향이 위로를 준다. 큰 화면에 종합적 기운을 내뿜는 작품을 기대한다. 채효진의 그림은 한낮의 초점 없는 눈동자가 밤의 별이 되어 마음의 평안을 준다. 밤하늘 풍경에서 아마도 휴식을 얻고 모든 게 드러나는 대낮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이야기를 그린 게 아닐까? 그간 작품의 흐름이 작가 시선의 경험치와 일치하여 자연스럽고 진실되게 발전하고 있다.
임철민은 장마철 황토 빛 강물 위에 떠내려가는 여러 부산물처럼 흐르는 먹물 위에 삶의 의문과 질문, 희망을 가득 채운 뜻밖의 여정을 담은 그림을 그린다. 솔직한 마음을 담은 수묵의 힘은 위대하고 강하다. 근작인 <주관적인 풍경- 우리의 안산>이 그렇다. 이제는 심적으로 가벼워졌으면 한다. 임현경은 이웃하는 가까운 사물들에 애정을 두고 정원을 가꾼다. 파랑새가 안전하게 보호받는 숲의 장막 안으로 뜨거운 햇살과 차가운 바람을 가리는 장막을 치기도 한다. 따스한 위로가 그리운 사람들을 위한 그림을 그린다.
주형준은 자신의 그림을 '예쁘다'라고 표현했다. 정말이지 그의 서사적 수묵화는 매우 디테일한 완성도를 보여준다. 리듬 속 꿈틀대는 세계가 묵향으로 충만히 채워진 화면으로 완성된 작품은 이제 날카로운 칼날을 기다린다. 도려내져 벽면에 다른 의미의 섬들로 나눠진 사이 여백을 남기고 붙여진다. 이 때 예상된 기준을 초과한 벽면은 신작이 되고 또 다른 형상을 감상하게 된다. 멋진 공간의 협업을 기대한다. 윤혜선은 미지의 보랏빛 세상 어디쯤에 조그만 생명들이 움트는 자리를 그리는 작가다. 어떤 시간대를 담은 빛깔로 비어진 여백을 채워 '쓰인 어느 자리'가 눈에 들어온다. 감성적인 채색 환경에 주목할 때 그 어느 자리도 돋보이는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정서인은 소멸과 생성의 지속하는 자연대상(숲, 산, 섬, 파도)을 한지를 태우고 콜라주기법으로 종합적인 화면을 구성해가는, 생명력 강한 작품을 만든다. 이제 추상적이고 함축적인 이미지화도 기대할 수 있겠다. 김현수는 네모난 밭들과 삼나무 아래 고부랑길이 보이는 풍경 속에서 자랐다. 유년시절 고향 제주의 자연을 유아의 마음으로 담는 채색그림을 그린다. 내면의 풍경, 기억 저편의 단순화된 이미지로 변화하고 있다. 이 과정에 발색이 강한 매체의 적극적인 시도로 좀 더 선명히 반응하는 주제를 발견할 수 있겠다.
최혜인은 혼합매체를 통해 섬세하고 가녀린 결과 흐름을 갖고 먹거리 재료에 시선을 둔, 유기농같이 안전하고 건강한 발상의 작업을 한다. 시선을 접사하여 토마토나 수박, 브로콜리 등을 명랑하게 재현하는 즐거움이 가득한 그림을 그린다.
이번 공모전 수상작가들에게 심심한 축하의 말을 전한다. 또한 낙담했을지 모를 작가들에게 위로의 마음을 전하며 언제든 각자가 하는 현재의 '특별한 작품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게 되리라는 믿음을 갖고 더욱 정진하길 소망한다.